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.18 민주화운동 (문단 편집) == 항쟁 관련 어록 == > '''계엄군은 가짜 애국, 광주시민 진짜 애국 / 계엄군이 진짜 폭도, 광주시민 민주의거 / 계엄군은 정권강도, 광주시민 민주항쟁''' - 5.18 당시 궐기대회에서 낭송된 시 <계엄군과 광주시민>[[http://www.518archives.go.kr/books/ebook/2/#page=86|전문]] > '''[[민주화]]여!'''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! / 피와 땀이 아니곤 거둘 수 없는 거룩한 열매여! /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/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 왔노라. - 5.18 당시 궐기대회에서 낭송된 시 <민주화여!>[[http://www.518archives.go.kr/books/ebook/2/#page=84|전문]] > 우리는 보았다.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.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.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.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. - 전남매일신문기자의 [[https://img.huffingtonpost.com/asset/5d80c7b7230000e90355cf23.jpeg?ops=scalefit_630_noupscale|집단사직서]] >'''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(계엄군에게) 총을 쐈을 것이다.''' - 89.2.23. 국회청문회에서 [[천주교 광주대교구]] [[조철현]] 비오 [[신부(성직자)|신부]]([[몬시뇰]])[* 영화 <[[화려한 휴가]]>의 김 신부의 모델이 된 인물.] >임신 8개월의 딸이 숨졌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뛰고 있었다. 민정당 의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똑같은 일을 당해보라고 얘기하려 했는데 아무도 안 나왔으니 - 89.2.22. 국회청문회 김현녀[* 밑에 서술된 최미애 씨의 어머니] 증인 >딸이 행여 살아서 돌아올까봐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있으며, 밤에 바람소리만 스쳐도 집 밖에 나가보곤 했다 - 88.5.21. 행불자 추가 신고한 이옥순 >졸업장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, 광범이는 안 좋아할 거요. 그때의 주범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? - 88.12.3. 5.18 명예졸업장을 받은 방광범 군의 아버지 방두형 >'''여보, 당신은 천사였오.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''' - 임산부임에도 학살된 최미애의 묘비명[* 당시의 표기는 "-이었오"만 쓰였고 "-이었소"는 없었다.][* 당시 최미애 씨는 [[전남고등학교]]에 재직 중이던 남편을 기다리며 집 앞에 서 있었으나,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. 이때 뱃속에 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는데, 이 아이도 얼마 가지 않아 엄마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.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이었다.] >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가족이 왜 총을 맞아야 했는가를 모르겠어요.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가려 했는데 왜 우리에게 무차별 총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. - 88.5.15. 최연소 부상자 김준향 >살아 생전 아들의 뼈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 소원이다. - 5.17 행방불명자의 부친 김점식 >'''동포여,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?''' - 1980년 5월 30일, 당시 서강대 학생인 [[김의기]] 열사가 투신자살 직전에 남긴 유인물 <동포에게 드리는 글>의 한 구절 >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,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,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? - 1980년 6월 9일, 노동자인 [[김종태(1958)|김종태]]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<광주 시민/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> 중에서 >30년 전 [[6.25 전쟁|6·25]]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[* 難澁. (말이나 글 따위가) 어렵고 까다롭다. 순화어는 '어렵다'.]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. (중략)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. - 80.5.28 [[조선일보]] 사설[* 이러한 내용은 당시 계엄사의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다.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0052600329201008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80-05-26&officeId=00032&pageNo=1&printNo=10662&publishType=00020|80.5.26 경향신문 기사]]] >[[중국]] [[문화대혁명]]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. 이런 갈등, 이런 불화,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(책임자)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, [[덩샤오핑|등소평]]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. 거기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. - 95.10.5 경신회[* [[경북고등학교]] 졸업생 중 정관계 인사들의 모임.] 모임에서 [[노태우]] >'''광주는 살아있다!''' - 1988년 6월 4일, [[숭실대]] 학생 [[박래전]] 열사가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분신하며 외친 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